모든 건 이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됐습니다. 통학 왕복 세 시간. 기숙사 되기엔 애매한 거리셔서 군대 갔다 오고부턴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심. 1~3학년 내내 징글징글하게 했던 친목 학생회 다 털고 막학년 시작인데, 학교 근처에서 회식한다던 학생회 후배 애들 꽐라 됐다는 소식 듣고 숙취해소제 여러 개 사 가는 것 같음. 이런 동 선배에 대한 글입니다. 1. 대...
정재현은 이전의 연애를 복기한다. 딱히 떠오르는 얼굴들이 없다. 절절한 연애는 한 적 없고 절절한 사랑은 받아 본 적 있어 겨우 그 사람 얼굴을 떠올려 본다. 고등학교 이 학년 때였나. 우산 없이 학교를 나가던 정재현 뒤로 우산이 씌워졌다. 상대는 정재현을 짝사랑하던 소녀. 정문 나가는 정재현 뒷모습 보고 야자하던 삼 층서부터 뛰어왔단다. 뛰느라 우산의 기...
정재현은 자신의 영혼이 자신의 얼굴에 갇힌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이 무슨 소리냐. 시도 때도 없이 개그 치고 상황극 하고 혼자 이상한 짓 하는데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는 건 그의 얼굴 때문이란 거다. 하지만 정재현은 통탄스러웠다. 관심은 관심이긴 한데… 자신의 개그를 받아 친다거나 웃어 주는 게 아니라 얼굴에 관심을 뒀기 때문이다. 와, 재현이는 한마디...
스물도 만나 주라. 내 집이 돼주라. 나도 날 줄 테니 오빠도 오빨 주라. 오빠, 제발 스물도 좀 만나 주라. 김도영은 굳이 이상형을 물어보지 않아도 연상녀를 좋아할 것 같았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면 무조건 아이고 모드 들어가는 게 딱 봐도 연하를 연애 상대로 보지 않는 게 훤했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 태어나는 게 안 됐다면 좀 더 일찍 만날걸. 서하진이...
벚꽃 나무 비싸다던데 대체 누가 학교에 이렇게 벚꽃 나무를 많이 심은 건지. 바람 한 번에 후두두 떨어지는 벚꽃들이 호수를 핑크빛으로 물들였다. 호수 양옆으로도 핑크빛이다. 씨씨 하지 말라는 선배의 피 같은 조언을 어긴 커플들이 손 잡고 걸어간다. 가는 길에 사진도 몇 장 찍고 떨어지는 벚꽃 잡으며 이러면 사랑이 이루어진대 하고 꺄르륵 웃는 것까지 이제 막...
애들 죄다 맛가고 진짜 말술들만 남은 시간이었다. 거기엔 김도영과 심소윤도 포함돼 있었다. 김도영은 여기서 더 마시면 진짜 토할 거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필사적으로 거절해 살아남았고, 심소윤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인간이라 멀쩡했다. 남은 사람들끼리 테이블을 작은 곳으로 옮겼다. 어쩌다 보니 마주앉게 된 김도영에 심소윤이 먼저 말을 뱉었다. 잔 들어...
이건 누구에게나 오빠인 그 연하의 이야기 연하는 만나도 스물은 안 만난다. 스물한 살 주제에 할 말은 아니었지만 위계질서 빡센 대한민국에서 일 년 빨리 태어난 건 유세다. 그러니 저 문장은 스물한 살이 말해도 어느 정도 용납된다. 일각에선 지도 어린 주제에 꼰대 짓 한다고 했지만 아예 공감을 못 받는 건 아니다. 누구는 고개 끄덕인단 뜻이다. 헌팅포차 가서...
전에 세브란스 후기 쓸 때 아무 플레이리스트나 갖고 와서 링크 달아놨는데, 후기처럼 막 집중 안 해도 되는 글 읽을 때 보니까 괜찮더라고요? 노래와 함께 본론 Let's go 글 비하인드 저 학교 다닐 때 사람 다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후배한테 윽박지르는 체교과를 본 적 있어요. 충격이었습니다. 제 세대엔 군기라는 말은 겁주려고 하는 장난이고 전부 사라진 줄...
고등학교 선생님들 중에 화려하게 입은 선생님 없다. 교무실에 이십 대부터 오십 대, 많게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계신 선생님들이 가득한데 화려하게 입기엔 꽤 눈치 보일 거다. 체육 선생님은 어느 정도 예외다. 눈이 멀 정도로 삐까뻔쩍한 형광 바지나 선글라스, 무릎 아래까지 오는 양말 등은 어느 정도 허용된다. “내 기능성 티 중에 핑크색은 있어도 머리칼은 진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에서 두 주인공 미란다와 앤디의 관계가 급변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미란다의 자택으로 심부름을 온 앤디가 올라가지 말아야 할 계단을 밟아서 미란다의 사생활을 알게 된다. 모든 게 화려하고 완벽했던 미란다는 남편과 불화를 겪고 있었다. 그걸 부하 직원에게 들킨 것이다. 당혹. 혼란. 분노. 수치. 여러 감정이 뒤섞인 미란다의 숨...
전기톱을 들고 있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이 문을 쿵쿵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외친다. 재미있게 술자리를 즐기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정색하며 다급히 가 보겠다는 친구가 있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갑자기 내게 아는 척을 하더니 뒤에 쫓아오는 아저씨를 향해 불안한 듯 눈짓을 한다. 놀이터에 혼자 있는 아이에게 친근하게 접근해 이름이 뭐냐고 물은 뒤 우...
보고 싶단 말을 헤프게 써 본 적 없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 보고 싶다는 말 외엔 딱히 쓸 일 없었다. 이는 정말 눈으로 보는 행위를 말한다. 필름이 이어진 장면들을 눈으로 담고 싶다는 뜻의 보다와 싶다. 그래서 김여주는 나재민을 보고 싶어 하는 이 점 하나가 어떤 의미로 나재민을 보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다. 보고 싶다, 재민아. 이 말이 가진 무게가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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